의식의 다양한 차원들이 표현되는 방법은 실로 심원하며,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영역이 광범위하다.
그것들이 끼치는 영향은 미묘하면서도 엄청나다.
200 이하의 수준은 개인이든 사회이든 파괴적인 삶을 뜻하며, 200 이상의 수준은 잠재력의 건설적인 표현이다.
200이라는 결정적인 수치는, 잠재력과 억지의 힘의 분기점이 된다.
의식의 에너지장에 상승하는 감정을 거론할 때 유념해야 할 것은, 감정이란 것이 한 개인의 내면에 순수한 상태로 명백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이다. 의식의 여러 층들이 언제나 복합되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삶의 조건 속에서는 이런 의식 수준이었던 사람이 다른 조건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의식 수준일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총체적인 의식 수준은 이처럼 다양한 여러 수준들을 합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에너지 수눈 20: 수치심
수치심의 수준은 위험할 정도로 죽음과 가장 가까운 상태로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자살할 수도 없으니 마지못해 살아간다는 식의 자세다. 이 수준의 공통점은 죽음을 피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잔인성의 도구로 쓰이며, 여기에 희생된 피해자는 자기 자신들 또한 잔인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치심'에 찬 어린이들은 동물을 학대하고, 자기들끼리도 잔인하게 굴곤 한다.
의식 수준이 단지 20대에 머무는 사람들의 행동은 아주 위험하다.
그들은 비판적이거나 피해망상적인 환상을 보기 쉽고, 정신병 환자가 되거나 엽기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쉽다.
에너지 수눈 30: 죄의식
이 수준은 빈곤, 절망, 자포자기로 특징지어진다.
현재와 미래가 황폐해 보이고, 비애가 인생의 주제로 보인다. 이 단계는 아무 희망이 없는 상태로, 여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도움이 필요하나 그 도움조차도 그들에게는 쓸모없게 느껴질 뿐이다.
보살펴 주는 사람에 의해 외부의 에너지가 조달되지 않는 한, 무기력에 의한 죽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집도 없이 헤매는 사람들과 사회의 낙오자가 이 수준에 속한다.
나이 든 노인들의 체념 상태이기도 하고, 또 만성 질병이나 심한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의 수준이기도 하다.
테레사 수녀와 그 추종자들이 걷는 인도의 캘커타 거리야말로 바로 이 수준에 해당된다.
이 수준은 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조차 갖기 힘든 희망의 포기 상태다.
에너지 수준 75: 슬픔
이 상태는 슬픔, 상실, 낙담의 수준이다.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지만 이 수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되는 후회와 우울함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어렸을 때의 커다란 상실은 슬픔과 비탄을 삶의 필요악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쉽게 만든다.
비탄에 빠진 사람들은 만사를 슬픔의 시선으로 바란다.
'슬픔'은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도 있지만 '무기력'의 상태보다는 더 많은 에너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충격받은 무기력증 환자가 울기 시작하면 그것은 회복의 조짐이다.
또 일단 울기 시작하면 무기력증에서 벗어나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간 문제다.
에너지 수준 100: 두려움
100의 수준에는 좀 더 활발한 에너지가 보인다. 위험에 대한 두려움은 건강한 반응인 것이다.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이 위험해 보이고, 함정과 위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려움은 편집증이나 신경증적인 상태로 진전될 수 있고, 전염성이 있어서 사회 전체를 지배할 수도 있다.
두려움은 개인의 성장을 제한하고 억압 상태를 초래한다.
두려움의 수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뚫고 일어설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에,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그보다 높은 수준으로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두려움의 수준에 사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한 것으로 보이는 강력하 지도자를 희망하며, 그 지도자가 자신들을 두려움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기대한다.
에너지 수준 125: 욕망
금전,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은 '두려움'의 수준을 벗어난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욕망은 또한 집착의 수준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에서 때로는 욕망이 인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욕망에 사로 잡힌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 동기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Tv는 억압받는 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무기력'에 빠진 사람들에게 '갖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리를 털고 일어나 더 나은 삶을 추구하도록 만든 것이다.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사람은 성취로 가는 출발선 위에 설 수 있다.
욕망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더 높은 수준으로 뛰어오르는 도약대가 될 수 있다.
에너지 수준 150: 분노
분노는 살인이나 전쟁으로 발전할 수도 있지만, 에너지 수준 자체는 죽음의 주위에서 맴도는 단계에서 훨씬 벗어난 상태다.
분노는 파괴적일 수도 있고 건설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무기력'이나 '슬픔'에서 벗어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상태에 이르면, 이제 그들은 무엇인가를 원하기 시작한다.
'욕망'은 좌절감을 초래하고, 좌절감은 '분노'를 가져온다.
그런 이유로, '분노'는 억압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분노'는 좌절된 욕구에서 생기므로 그 아래 수준인 욕망의 에너지장에 기초를 두고 있다.
좌절은 지나친 욕망에서 온다.
분노는 증오로 전환되기 쉽고, 증오는 한 개인의 삶 전체를 부식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에너지 수준 175: 자존심
이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낮은 에너지장에 있는 사람들에 비해 훨씬 긍정적이다.
자존심의 향상은 낮은 의식세계에서 그들이 경험한 모든 고통의 진통제가 되어준다.
자존심은 삶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는 버팀목 구실을 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자존심의 팽만은 추락하기 일보직전'이라는 점이다.
자존심이 방어적이고 약점 투성이인 것은, 자존심이란 외부 조건에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며 또 그것 없이는 언제라도 낮은 수준의 의식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부풀어 오른 자존심은 비난에 약하다.
자존심은 아주 쉽게 '수치심'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약한 의식 수준이다.
'자존심'의 약점은 오만과 부정이다.
이러한 특성상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의식의 성장을 스스로 차단한다.
'자존심'이 있는 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존심에 가득 찬 사람들은 감정적인 문제임에도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신의 성품이 갖고 있는 약점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정하는 문제의 근원에는 '자존심'이 자리 잡고 있다.
'자존심'은 진실한 성장과 명예를 안겨 줄 수 있는 참된 내면의 힘을 가로막는 커다란 장애물인 것이다.
에너지 수준 200 :용기
200의 수준에서는 내면의 참된 잠재력이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200이야말로 인생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구분해 주는 분기점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풀이한다.
우리는 이 순에서 비로소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시작하며, 이 단계야말로 탐구, 성취, 인내, 결단의 영역이다.
이보다 낮은 수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희망이 없고, 슬프고, 무섭고, 좌절감으로 가득 차 보인다.
하지만 '용기'의 수준에 이르면 인생이 흥미롭고, 도전적이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이 수준에 이르면 두려움이나 성격의 결함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 두려움이나 결점에도 불구하고 성장할 수 있으며,
걱정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낮은 의식 수준에서와는 달리 노력 자체를 마비시키지는 않는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자기가 흡수하여 소모하는 에너지만큼 세상에 그 에너지를 되돌려 보낸다.
반면, 낮은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로 환원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에너지를 흡수한다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전체적인 의식 수준은 오랫동안 190에 머물렀으나,
20년 전부터 204의 수치로 괄목할만한 비약을 보여주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사항이다.
에너지 수준 250: 중용
이 수준이 매우 긍정적인 에너지인 것은,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편파적인 관점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기 때문이다.
편파적인 태도는 극단적인 대립을 초래하고, 대립은 분열과 반대를 낳는다.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반대와 장애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중용'의 태도는 유연성과 포용력, 문제에 대한 현실적인 파악 능력을 갖게 해 준다.
'중용'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고, 이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자기 신뢰를 잃지 않는다.
함께 지내기가 쉽고, 친하게 지내더라도 전혀 위험하지 않다.
그들은 온화하고 근본적으로 정서가 안정되어 있다.
그들의 태도는 비난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싶다는 충동도 느끼지 않는다.
'중용'에 다다른 사람들은 자유를 아주 중시하므로, 그들을 규제하려는 일은 아주 어렵다.
에너지 수준 310: 자발성
매우 긍정적인 이 수준의 에너지는 더 높은 수준에 이르기 위한 관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성장이 빠르고, 마치 향상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인다.
'자발성'이란 인생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저항을 극복하고 기꺼이 참여하는 마음이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마음이 답답하게 닫혀 있지만,
310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진실로 친절하게 대하고, 사회적, 경제적 성공이 저절로 따른다.
'자발성'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실직을 해도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하고, 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들은 밑바닥 일이나 손님을 접대하는 일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으며 사회의 선에 이바지한다.
그들은 또한 내면의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배움에 장벽을 두지 않는다.
'자발성'이란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기꺼이 응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이 수준의 사람들은 사회를 움직이고 사회에 기여한다.
그들은 '자존심'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결점을 기꺼이 바라보려고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배우려고 한다.
에너지 수준 350 : 포용
이 수준에 이르면 우리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경험을 창조하며 그 원천이 된다고 이해하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책임감이야말로 이 단계의 특징으로, 인생의 여러 외적인 힘에 대응하면서도 조화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200 이하의 사람들은 무력하며, 자신들을 인생이란 폭군의 피해자로 바라보기 쉽다.
이러한 생각은 자신의 행복이나 문제의 근원이 '밖'에 있다고 믿는 데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 수준에 이르면 행복의 근원이 자신 속에 존재한다고 깨달음으로써 커다란 도약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경지에서 그들은 '외부'의 그 어떤 것도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
또 사랑이란 다른 사람들에게서 오거나 그들에 의해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포용'이란 무기력의 한 형태인 무저항과는 다르다.
여기서 말하는 '포용'이란 슬프고 기쁜 인생사를 받아들일 수 있고 세상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억지로 끌어가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물을 오해나 왜곡의 감정 없이 볼 수 있다.
경험의 의의를 깊게 이해함으로써 결국 사물에 대해 '부분적이 이 아닌 전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된다.
'포용'의 수준에 있는 사람들은 옳고 그름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문제 해결과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정열을 쏟는다.
어려운 과제나 일을 만나더라도 괴로워하거나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에너지 수준 400 : 이성
이 수준에 이르면 이보다 하위 수준의 감정 단계를 벗어남으로써 지성과 이성이 삶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이성'의 단계에서는 광범위하고 복잡한 자료들을 처리할 능력을 갖고 있어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준다.
관계의 미묘함, 점진적인 변화와 분명한 차이점이 있는 것에 대한 이해력이 높아지고,
추상적인 개념과 같은 상징체계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 의학, 그리고 개념화에 대한 이해 수준이 점차 증가되는 것도 이 수준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교육과 지식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추구되곤 한다.
이해와 정보가 성취의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 400 수준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다.
노벨상 수상자, 위대한 지도자, 대법원의 판사들이 이 수준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이인 슈타인, 프로이트 등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도 이 수준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수준의 결점은 상징과 그 상징이 뜻하는 바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또 세상사에 대한 객관적, 주관적인 이원론 때문에 사물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이 수준에서는 나무에 가려 숲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쉽고, 개념과 이론의 탐닉에 의해 본질의 중요성을 찾지 못하고 지식 자체로 그치고 마는 경우가 흔하다.
'이성'의 수준은 본질이나 복잡한 문제의 핵심에 대한 통찰력을 갖지 못함으로써 한계를 갖게 된다.
이성만으로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지적인 방법론이 지배하는 현 사회에서 이성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높은 의식세계로 나아가는 데 커다란 장애물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수준을 초월한다는 것은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는 흔지 않은 일이다.
에너지 수준 500 : 사랑
언론이나 tv에서 묘사하는 사랑은 여기서 말하는 수준의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같이 되어 있지만, 이러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지독한 감상주의의 소산에 불과하다.
'자존심'에서 비롯된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그런 관계 속에서는 사랑이 머무르지 않는다.
500의 에너지 수준은 조건 없고 변함없고 영원한 사랑에의 눈뜸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랑이란 외부의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내부에서 그 근원을 찾기에 이 수준에서의 사랑은 오르내림의 파동을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것이 존재 자체가 된다.
사랑은 용서와 보살핌의 세계로 가는 길이다.
사랑은 지적인 것도 아니고, 표면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 수준에 이르면 사물의 본질을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 증대하여 문제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게 된다. '이성'의 수준을 넘어서게 됨에 따라 문제를 전체적으로 불 수 있는 능력이 생기고,
전후 과정을 섬세하게 알아차릴 수 있다.
이성은 무제를 일일이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사랑은 전체를 다룬다.
직감 혹은 육감이라고 불리는 이 사랑의 능력은, 사물을 꽃 꼬치 따지지 않아도 즉각 알아차릴 수 있게 한다.
이 수준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단계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사랑이라는 주제에 매혹당하고 있고 현존하는 모든 종교가 500 혹은 그 이상의 수치로 측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0.4%만이 이러한 수준의 의식 세계에 도달한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에너지 수준 540: 기쁨
'사랑'에 조건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내면의 '기쁨'이 점차 차오르게 된다.
이 수준에서의 '기쁨'이란 사건의 변화에서 오는 갑작스러운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활동에 동반되는 항구적인 것이다.
540의 수준에서는 치유가 시작되며, 영적인 자조 그룹은 이 수준에 속한다.
540 이상부터는 성인, 영적 치유자, 그리고 그 제다들의 영역이다.
이 수준의 특징은 이들이 갖는 자비의 마음 상태다.
이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이들에게는 사랑과 평화를 널리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랑과 신성의 표현이다.
이들은 우리들이 기대하지 못하는,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에너지장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지, 어느 한 개인의 힘은 결코 아니다.
이 수준에서 느끼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이보다 낮은 수준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근복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어느 특정한 개인보다는 생명 자체의 유익을 위해 쓰려는 강한 욕구를 느끼게 된다.
많은 사람들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은,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의 능력도 증폭될 수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사망 선고를 듣고도 다시 살아난 사람들은 그 경험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 사람들이 적지 않고,
또 그들 중 대부분은 540~600의 에너지 수준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에너지 수준 600 : 평화
이 에너지장은 초월이나 자아실현, 신 의식 등의 용어로 묘사되는 경험과 깊이 관련된다.
이 수준은 천만 명 중 한 명꼴로 나타나는 아주 드문 현상이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에게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가, 또 특별한 과점이라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복의 상태에 잠겨 있으므로 세상일에 더 이상 흥미를 갖지 않고, 따라서 범인의 생활을 하지 않는다.
영적 지도자가 되기도 하고, 확연히 드러나진 않지만 인류의 개선을 위해 일하기도 한다.
또한 자신의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하여 사회에 커다란 공헌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드문 경우에 속한다.
기존 종교의 형식을 초월한 이 수준의 사람들은, 모든 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순수한 영성의 소유자들이다.
600이나 그 이상의 수준에서는 아무것도 멈춰 있지 않는데도, 아니 오히려 발랄하고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인데도,
세상 전체가 시간과 공간이 멈춰 서 있는 가운데 마치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그들은 이 세상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무한한 가능성과 의미로 가득 찬 진화의 춤을 계속 추고 잇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놀라운 계시는 이성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그들의 마음은 그 무엇도 개념화하는 일이 없이
절대의 침묵에 잠겨있다.
에너지 수준 700~1,000 : 깨달음
이 수준은 영적 완성자의 단계로서, 수많은 세대를 통하여 군중들이 추종하고 따르며 영성의 원천으로 삼는다.
이 사람들은 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이들 자체가 신성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강렬한 영감의 소유자로서, 이들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주는 끌개 에너지장을 형성한다.
이러한 깨달음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묘사한 그림들은 소위 '무드라 mudra'라 부리는 특별한 손 모양을 보여주는데,
손바닥에서는 축복의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된 인간으로는 가장 높은 수준으로서, 우리가 아는 세 성인에게는 주 Lord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주 크리슈나, 주 부처, 주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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