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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의식혁명] 제3부 의미 제1장 의식의 데이터베이스/제2장 의식의 진화-데이비드호킨스

Realtor Choi(성실중개행복충전소) 2022. 12. 7.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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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의식의 데이터베이스 p215

 

 

칼 융은 인간 경험의 장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면서 '동시성 synchronic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여기'의 사건이 '저기'의 사건의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두 사건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순서에 따라 일어난다는 뉴턴적인 선형 개념이 아니라면, 두 사건 사이를 이어주는 것은 무엇일까?

물론 두 사건들은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서로 관련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중력이나 자기장이나 우주 풍이나 에테르에 의해 연결된 것은 아니다.

 

두 사건은, 두 사건을 동시에 포함하는 같은 등급의 끌개장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건들이 거의 동시에 이러 나든 시간차를 갖고 순서대로 일어나든 사건으로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사건의 '연관'은 관찰자의 의식 세계 내에서만 일어난다.

관찰자는 하나의 연관성을 '바라보고', 그 관계를 자어하며 '짝을 이루는' 사건을 설명한다.

이러한 관계는 관찰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이다.

이 우주에는 눈에 보이는 어떤 필연적인 사건이 존재할 필요성이 없다.

밑에 깔려 있는 끌개 패턴이 없다면, 그 어는 것도 경험될  수 없다.

따라서 눈앞에 현현하는 우주 전체는 동시적인 표현이며 경험 그 자체다. p217

 

전지란 전능과 편재를 말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거리가 없다.

앎이란 질문을 던짐으로써만 무지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은 건축가의 마음속에서만 태어났다.

인간의 의식은 보이지 않는 개념을 '그 빌딩'이라는 명백한 경험으로 변화시켜 주는 매개체다.

그때 시간은 얼어붙는다.

그리하여 1933년 뉴욕시 32번가에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건물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설계자의 의식에서 '일어난' 사건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데이터 베이스 속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ABC의 수준으로부터 볼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A-B-C의 변천 과정에 완전히 얽매여 있다.

비범한 사람들만이 ABC의 세상에서 산다.

(이러한 높은 수준과 순수 의식의 형체 없는 영역에 사는 사람들을 신비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앞서 나아가는 신비주의자들은 ABC의 수준만이 '실재'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은 꿈이나 환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이것 또한 또 하나의 한계를 지닌 관점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은 실재도 아니요 비실재도 아니며, 단지 '있을' 따름이다.

'있는' 것은 모든 관점에서나 무의 관점에서나 있는 것이다. P218

 

 

형태를 갖지 않는 존재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음과 양, 나타나는 것과 나타나지 않는 것, 형체가 잇는 것과 없는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시간과 무시간 등을 포함하여, 궁극적인 실재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동시에 '참된 Real'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전능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함해야 하기 때문이다. p219

 

그러므로 창조란 계속적이거나, 창조란 것이 전혀 있을 수 없거나 둘 중의 하나다.

창조의 '시작'을 찾는 일은 인간이 만들어낸 시간 개념의 산물일 뿐이다.

시간밖에 존재하는 어떤 것의 '시작'을 시간 속에서 찾을 수는 없다.

빅 뱅은 관찰자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일 뿐이다. p219

 

우주는 매우 협조적이다.  우주가 의식 자체와 다르지 않은 믿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창조해 낼 수 있고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우리들이 모든 일련의 사건들을 인과관계에 의해 차례차례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우리가 시간관념에서 비켜서기만 하면 거기에는 어떠한 원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p219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절연체의 한쪽 면에 전자가 일렬로 서 있고 똑같은 균형을 위하고서 다른 쪽 면에 양성자가 일렬로 서 있다면,

어느 쪽이 다른 쪽의 원인이 되어 줄을 세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치유는 자비심의 결과지만, 자비심이 치유의 '원인'은 아니다.

600이나 그 이상의 에너지장에서는, 거의 무엇이든지 치유가 된다. p219

 

모든 생명과 모든 형태들의 원천은, 현현되는 것들보다 더 거대한 그 무엇이다.

그렇지만 나타난 것과 나타나게 하는 근원은 다르지 않으며,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는 어떠한 분리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는다.

성서에서 말하듯이,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시간이란, 이미 완전하게 정립된 호로 그램을 인식하는 한 시점에 불과하다.

시간은 관점의 이동에 "따라 나타나는 주관적이고 감각적인 결과에 불과하다.

홀로그램에는 시작이나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디에서나 이미 완전하게 존재한다.

사실상, '완전하지 않게' 보이는 현상도 완전성의 일부일 뿐이다. p220

 

'펼침'의 현상 자체도 한정된 관점의 반영물일 뿐이다.

포갠 우주도 펼쳐진 우주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식되는 우주만이 있을 뿐이다.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풍경이 자기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는 여행자에 비유될 수 있다. 여행자 앞에 풍경이 펼쳐진다는 것은 말의 표현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펼쳐지는 것은 없으며, 그 무엇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인식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p220

 

하늘과 땅의 모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을 만드신 이는 양쪽을 두루 포용하고,

양쪽을 두루 초월하고, 만물과 일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창조자의 인식을 알아차리고, 창조자의 표현을 의식으로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진술일 뿐이다.

 

 

우주에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을 뿐이다.

다른 모든 것은 한정된 감각이나 개인의 집념에서 나오는 불완전한 사실일 뿐이다.

'삶이냐, 죽음이냐?'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존재할 것이냐 저렇게 존재할 것이냐의 문제다.

그러나 '존재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p221

 

인식 자체는 '있다'라거나 '있지 않다"와 같은 모든 개념을 초월한다는 것을 진술할 수 있을 뿐이다.

'있다'는 것은 의식 자체에 의해서만 품을 수 있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앎 자체는 의식조차도 초월하여 존재한다.

따라서, '절대'란 앎을 초월하기 때문에, 의식 자체가 가 닿는 너머에 있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깨달음에 도달한 사람들은 절대란 설명될 수 없다고 말하며,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야말로 '실재'에 대한 우주적이고 영원한 진술이다.

우리가 '실재'를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그러한 알아차림이야말로 깨달음의 진수이며, 자기를 초월하는 의식 진화의 마지막 단계가 된다. p222

 

 

 

제2장 의식의 진화  p223

 

 

개인들의 운동 역학 시험이나 역사적인 분석에 의해 수치 계산을 해보면,

사람들은 평생 동안 평균 5점 정도의 의식 진전을 이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평생 동안 마주치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들은 불과 몇 가지의 교훈만을 배우는 셈이다.

 

지혜를 얻는 것은 더디고 고통스럽다.

아무리 익숙한 관점이라도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여겨지면 서슴없이 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성장과 변화에 대한 저항은 이처럼 심각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을 낮은 의식 수준에 묶어 두는 믿음을 바꾸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 같다. p223

 

일본인들은 2차 세계대전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고, 그로써 괄목할 만한 의식의 진전이 있었다.

반면,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인의 의식 수준은 떨어졌다.

 

ABC뉴스에 따르면, 어린이들의 총기 소지가 부모들의 허락이 필요하지 않게 된 피닉스에서는 1993년 1월 1일, 3살 된 아이가 2년 6개월 된 아이를 초기로 살해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선택의 자유가 있으며 각 개인에게는 다른 대안을 택할 수 있는 융통성이 주어져 있다.

고도의 이론물리학 비선형 동역학, 그리고 비선형 방정식의 본질을 살펴볼 때,

우리에게는 선택이 가능할 뿐 아니라 필수적임을 알 수 있다.

 

불규칙은 규칙에서 나오고, 모든 끌개 패턴은 한 '가닥'의 실과 같을지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지만 변화를 초래하는 선택이란 과연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무엇이 선택을 재촉하는가? 누가 종용하며, 왜 종용하는가?

이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P224

 

 

개인이든 집단이든, 성장은 더딜 수도 있고 빠를 수도 있다.

성장은 억제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경향성에 영향을 받는다.

우리 모두에게는 수많은 기회가 항상 주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항상 자신들이 좋아하는 상황만을 원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선택 범위는 대개는 개인의 비전에 한정된다. P225

 

관점, 가치관, 의미 등은 조직적인 끌개 에너지장의 한 부분에 속하는 에너지 패턴의 미묘한 거미줄을 다른 말로 바꾼 데 불과하다.

끌개 에너지장은 더 큰 끌개 에너지장의 일부이고, 이렇게 무한으로 계속되어 결국 의식 자체의 전체적인 장을 포함하게 된다.

 

그렇게 복잡하고 거대한 에너지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600~700의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높은 의식 수준의 사람들이 갖는 상상할 수 없는 이해력에 경이를 느낄 뿐이다. P225

 

의식의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꺼이 하는 태도다.

이러한 자발성은 사물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가져오고,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가설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마음의 문을 열게 한다.

사람들이 변화하게 되는 동기는 여러 가지이고 셀 수도 없지만, 어떤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에 접할 때에도 이런 변화가 자주 목격된다. 선禪 같은 자기 연마의 분야에서는 이러한 모순이나 수수께끼 같은 난국을 화두로 삼아 커다란 진전을 위한 디딤돌로 사용하기도 한다. P225

 

의식의 분포도에는 두 개의 분기점이 존재하며, 이 분기점들은 의식의 진화를 위한 도약의 발판이 되어 준다.

첫 번째는 200의 수준으로, 이 단계는 잠재력을 최초로 느끼는 수준이다.

이 단계에서는 남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의 행동이나 느낌, 믿음에 대해 책임을 질 줄 아는 성숙이 시작된다.

원인과 책임이 개인의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들은 무기력한 희생자의 처지에 남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분기점은 500으로, 이 수준은 사랑, 비판 없는 용서의 생활양식,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예외 없는 무조건의 친절함이다. P226

 

600~700의 수준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완전하고 동시성인 홀로그램의 가능성 속에서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형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이라는 어휘가 진정으로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P227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거리의 '부랑자'를 예로 들어 보자.

대도시의 깨끗하고 화려한 동네에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이 혼자서 호화 저택의 모퉁이에 기대어 서 있다.

의식의 여러 수준에서 노인이 어떻게 보이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P227

 

의식 주순의 밑바닥인 20(수치심)의 영역에서는 그를 더럽고 구역질 나며 창피한 존재로 생각한다.

30(죄의식)의 수준에서 사람들은 그의 상황을 비난한다.

50(절망)의 수준에서는 그를 자포자기 상태로 보고, 사회가 집 없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는 단적인 예로 본다.

75(슬픔)의 수준에서는 그를 비극적이고 친구 하나 없는 고독한 사람으로 본다.

 

100(두려움)의 수준에서는 그를 위협적인 존재, 혹은 사회악으로 볼 수 있다. 그가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125(욕망)의 수준에서는 그를 골칫거리로 파악하고는 왜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지 회의한다.

150(분노)의 수준에서는 그에게 폭행을 당할 것 같은 불안을 느끼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분개한다.

175(자만심)의 수준에서는 노인을 부끄러움을 모르고 자신을 향상하는 데 필요한 자존심조차 없는 삶으로 본다.

200(용기)의 수준에서는 근처에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시설이 없는지 알아볼 생각이 들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일자리와 거처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250(중요)의 수준에서는 노인이 우리를 괴롭히지는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그를 흥미롭게 볼 수 있다.

310(자발성)의 수준에서는 길모퉁이로 데려가 그에게 용기를 북돋아 줄 생각이 들고, 지역 봉사단체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350(포용)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에게 호 김심을 갖고 재미있는 얘기가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그가 지금 이런 처지에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400(이성)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이야말로 최근에 일어나는 경제와 사회 모순의 부산물이며 심리학 연구의 좋은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는 노인이 흥미로운 존재일 뿐 아니라 친근하고 신경을 써 주고 싶은 사람이 된다.

통속적인 사회적, 장의 범주를 벗어나서 자유를 향한 흔쾌한 노인으로, 물질에 대한 무관심에서 오는 평정과 지혜의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보게 된다.

 

600(평화)의 수준에서는 이 노인이 우리들 자신의 잠시 동안의 표현으로 보일 수 있다.

 

노인에게 접근함에 따라, 노인의 반응은 접근하는 사람의 의식 수준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어떤 사람에게는 신뢰감을 느끼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무서움을 느끼고 낙담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를 화나게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를 기쁘게 할 것이다.

노인은 어떠 사람은 피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꺼이 맞이하려 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보느냐에 따라 우리에 대한 대접도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 수준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결정하고, 피동적인 관찰자로서 우리가 직면하는 세상을 결정한다.  P229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 우리가 반응하고 있는 세상이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되고자 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인식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P230

 

의식 수준이 낮을수록 사물에 대한 응시가 힘들어진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흥미 있는 사실이다.

아주 낮은 수준에서는 사물과 만나는 초점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반면에 높은 의식으로 올라갈수록 오래, 그리고 아주 깊게 응시할 수 있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눈빛, 적대적인 눈빛, 그리고 결백에서 나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직시할 수 있는 눈빛들을 떠올려 보라. 잠재력과 인식은 손에 손을 맞잡고 나아간다. P231

 

의식의 흐름, 즉 생각과 인식, 느낌과 기억의 패턴은 끌개 에너지장이 이끌고 나아가는 것이며,

에너지장에 지배를 받는다.

이처럼 끌개 에너지장에 지배를 받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기도 하다.

이것은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 믿음, 목표에서 오는 것이다. P231

 

 

대다수 사람들은 특정한 형식으로 처리되고 또 특정한 가치관과 의미로 우리들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특정한 끌개장과 일치한다.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하고 신나게 보이는 것이 다른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흥미 없고 심지어는 구역질 나는 것이 될 수 있다.

진실이란 이처럼 두려울 만치 주관적인 것이다. P232

 

객관적으로, 생각이란 사실 세상 전체의 의식에 귀속된다.

개인의 마음이란 단지 이것들을 새로운 순열조합으로 배열할 뿐이다.

정말로 새롭게 보이는 생각들은 천재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나타나는데, 그들은 항상 이것들을 자신이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발견되거나 주어진 것이라고 느낀다.

 

마음은 마음에 비치는 경험을 진정한 것으로 납득시키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각 개인은 저마다 자신의 세상 경험만이 정확한 것이라고 비밀스럽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P233

 

우리는 의식 수준을 논의하면서 자존심이 갖고 있는 약점의 하나는 부정성에 있다는 것에 주목한 바 있다.

각자의 마음은 자신의 '옳음'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정'의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부정성이야말로 인간이 평생 동안 의식 수준을 5점 정도밖에 진전시키지 못하는 게 하는 장애물이다.

 

의식의 커다란 진전은 '내가 안다'는 착각을 버릴 때라야 비로소 가능하다.

기꺼이 변화하려는 태도는 흔히 개인들의 믿음이 다 허물어지고 더 나아갈 수 없는

아주 '밑바닥'에 처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닫힌 상자 속으로는 빛이 들어갈 수 없다.

위기의 좋은 점은 그것이 높은 의식 수준으로 가는 통로가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인생이란 배움의 터전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삶은 진정한 스승이 되어 줄 수 있다. P233

 

 

 

우리는 경험하는 것들을 기록하고, 관찰하고, 목격한다.

그렇지만 앎 자체 속에서 실제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앎은 경험하고 있는 것을 단지 기록할 뿐이다. 앎은 경험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앎이란 삶 자체와 동일한 무한한 잠 잴 거야의 끌개장을 두루 포용한다.

그리고 고도의 깨달음의 수준에서 보면 마음이 미혹된 바가 없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은 그 내용과 동일시된다.

마음은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들에 대하여 잘했다거나 잘못했다고 항상 판단한다.

마음은 자신이 하는 일이 고작 경험에 그친다는 것, 더 엄밀히 말하면 '경험을 경험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공허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지고 보면 마음이 세상을 경험하는 것도 아니고, 감각이 경험한 바를 보고할 뿐이다.

명석한 생각이나 깊은 느낌조차도 경험일 뿐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기능, '경험을 경험하는' 것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의식이 지니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은 순수함이다.

의식은 너무나 잘 속아 넘어간다. 의식은 들리는 것을 모두 다 믿어 버린다.

의식이란 테이프만 집어넣으면 곧이곧대로 쏟아져 나오는 녹음기와 같다.

우리는 자기의식의 순진무구함을 결코 잃는 법이 없다. 그것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하며, 믿음이 굳다.

의식의 유일한 보호자가 있다면

그것은 들어오는 것들을 제대로 분별할 줄 아는 앎이요 깨어 있는 정신이다. P234

 

마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의식 수준을 높일 수 있다.

마음을 관찰하게 되면, 겸손해져서 다 안다는 자만심을 버리게 된다.

이때 앎의 성숙이 시작된다.

겸허한 마음이 되어야 비로소 자신을 비웃는 능력이 생기며, 마음의 노예에서 벗어나 주인다워질 수 있다. P234

 

우리가 곧 마음 자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우리가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생각, 믿음, 느낌, 견해들의 주인은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지금 우리들이 믿는 생각의 체계는 우리에게 주어지고, 흡수되고,

우리와 동일시된 것에 불과하며, 새 개념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다.

이러한 지나가는 개념들에 가치를 덜 부여할수록

우리는 이 개념들이 우리를 지배하는 영향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마음의, 마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기쁨의 새로운 원천이 익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높은 의식 수준으로 올라감에 따라 존재 자체의 기쁨도 성숙한다. P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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